[세계의 스파이] 나움 에이팅곤: 트로츠키 암살의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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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열전

[세계의 스파이] 나움 에이팅곤: 트로츠키 암살의 지휘자

나움 에이팅곤(Nahum Eitingon: 1899-1981)은 구소련에서 활약한 스파이로 볼셰비키 혁명가인 레온 트로츠키 암살을 현장에서 지휘한 것으로 유명하다.

 

에이팅곤은 1899년 러시아 제국시절 벨로루시의 모길레프(Mogilev) 슈클로프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대계 제지공장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는 모길레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가 이끌던 사회혁명당에 들어갔지만 볼셰비키가 일으킨 10월 혁명 이후 흡수된다. 이어 창설된 붉은군대(赤軍)에 입대했으며 모스크바 노동조정관회의부에 배속돼 근무하던 중 고향인 벨로루시에서 반소 봉기가 일어나자 진압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1920년 당시 공안정보로 맹위를 떨치던 체카(Cheka)와 인연을 맺으면서 불과 21세의 나이로 첩보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당시 에이팅곤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체카 고멜(Gomel)지부의 부의장을 맡아 반소세력 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간 그는 볼셰비키에 반대한 반볼셰비키군(백군: 白軍)에 맞서 많은 전투에 참가했으며, 이 가운데 전 사회혁명당 일원이었다가 서방으로 망명한 보리스 사빈코프(Boris Savinkov) 조직에 대한 격퇴전에서 맹활약했다.

 

이에 힘입어 1923년 모스크바로 발령 받아 체카에서 개편된 통합국가정치국(OGPU)의 일원으로 동방과 반장을 맡기도 했다. 1925년에는 붉은군대 참모본부 군사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OGPU 해외과에 배속된다.

 

이때부터 에이팅곤은 터키와 중국(상해) 등지로 파견돼 첩보활동을 벌이며 본격적인 첩보원의 길에 들어서는 한편 지역망을 관리하고 지휘하는 리더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1926년 상해에 수석 영사로 입성해 일대 조직망을 관리했으며, 다음해에는 하얼빈 지국까지 관리권에 넣었다. 여기서 소련 군사고문단이 공산당과 대립하던 중국 국민당에 구금되자 이들을 석방하는데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전해진다. 1929년에는 터키로 날아가 활동을 벌였고, 얼마 뒤 귀국해 레오니드 나우모프라는 가명으로 OGPU 국장의 특별그룹에서 부(副)부장을 맡았다.

 

1930년대 초, 한때 미국에도 비밀리에 침투해 조직망을 심고 일본인과 중국인 이민자 중 공산주의자들을 포섭하는데 공을 들였다. 이들 가운데는 후에 리하르트 조르게 첩보망의 일원이 되는 일본인 미야기 요토쿠도 있었다.

 

한편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좌익 성향의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해 레오니드 코도프라는 가명으로 파견돼 조직망의 부책임자로, 요인 암살과 납치에 관여했으며 게릴라전을 지도하고 사보타주 활동을 전개한다. 스페인이 보유한 약 5억 달러 상당의 금괴도 모스크바로 빼돌렸다. 그러다 1939년 내전에서 공화파가 패배하면서 고문단 등과 함께 철수해 귀국한다.

 

1940년대 들어서는 본래 미국에 심어놨던 조직망을 활용해 과학공동체에 침투, 원자폭탄 연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했다.

 

특히 앞서 조셉 스탈린과 권력투쟁을 벌이다 패배하고 망명한 볼셰비키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가 이 시기에 멕시코에 머물고 있었는데, 스탈린은 그에게 트로츠키를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스페인 내전 당시 만난 공산주의자 라몬 메르카더(Ramon Mercader)를 영입해 멕시코로 침투했고 1940년 8월 코요아칸에 피신해 있던 트로츠키를 찾아내 살해했다. 그는 1941년 초 귀국해 레닌훈장을 받는다.

 

2차 대전 중이던 1941년 7월에는 내무인민위원회(NKVD)부속 특별그룹 부장으로 적 후방에 침투해 파괴공작을 주도 했으며, 특별임무 자동차화 저격 여단(OMSBON)이라는 독립부대를 편성해 지휘했다. 이와 함께 핵무기 개발에도 관여해 우라늄 광산을 개발하고, 대미 역정보 작전에 참여한다.

 

전후에는 이런 임무들에 따른 공로를 인정 받아 2등 스보로프 훈장과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훈장을 받았으며, 계급도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최상위 지도자 반열에 오르는 듯 했다. 그렇지만 이때부터 그의 인생 행로는 흡사 롤러코스트 같은 변화무쌍한 궤적을 그리게 된다.

 

에이팅곤은 1946년 대미 공작의 일환이었던 루돌프 아벨(Rudolf Abel) 침투를 지휘했다. 이어 1950년 9월에는 NKVD에서 개편된 국가보안성(MGB) 국외 파괴공작 업무국장에 오르며 순탄한 출세길을 이어갔다. 그러던 1951년 10월 MGB 내에 불어닥친 '유대인(시오니스트) 음모 사건'에 휘말려 체포되면서 한차례 곤경에 처한다.

 

그러나 얼마 뒤 스탈린이 사망하고 1953년 3월 석방돼 복귀, 첩보 및 파괴공작을 담당하는 제9과 과장으로 재기했다. 하지만 다시 7월 전임 수장인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가 권력투쟁에서 패하고 실각하자, 동반 체포돼 징역 12년을 선고 받아 부티르카 교도소에 수감된다.

 

결국 10년 넘게 복역한 끝에 1964년 석방됐으나 이미 첩보계 복귀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는 1965년부터 다양한 어학 능력을 인정 받아 출판부 선임 편집위원으로 일하다 은퇴해 1981년 81세로 사망했다.